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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술 문화사

중국 문화사 중 고대 한나라의 식문화 - ‘병’과 보리밥에 대하여

by 리포터-h 2024. 12. 24.


“병(餠)과 보리밥 그리고 맛있는 콩죽”. 이 말은 서한 사람 사유(史遊)가 지은 아동 계몽서 ‘급취편(急就篇)’ 중 한 구절입니다. 훗날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구절 중의 음식들은 모두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먹는 음식으로 고대 중국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먹었던 주식이었습니다. 이 관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중요한 주식 전통이 되었습니다.

중국 문화사 중 고대 한나라의 식문화 - ‘병’과 보리밥에 대하여
고대 한나라의 분식 문화


고대 한나라의 ‘병(餠)’

‘병’이란 대체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두루 가리킵니다. 각종 ‘병’은 보통 가공법이나 첨가된 원료에 따라 구분했는데, 예를 들면 쪄서 만든 만두와 포자 등을 ‘증병’이라 불렀고, 물에 삶은 국수와 수제비는 ‘탕병’이라 불렀습니다. 불에 구워서 익힌 ‘대병’은 ‘소병’ 혹은 ‘노병’이라 했고, 기름에 튀긴 ‘병’은 ‘유병’이라 했고, 그 속에 깨를 넣은 ‘병’은 ‘마병’이라고 했는데 그 밖에 모양에 따라 이름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병’의 원료로는 오곡을 전부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중 밀가루를 가장 좋은 것으로 쳤습니다. 밀 재배는 한나라 때 이미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밀은 중국 북방 사람들의 식생활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오곡 중의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밀가루 가공술은 한나라 때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는데, 일찍이 진나라 이전 발명된 맷돌을 이용한 기술도 이 시기에 이르러 더 많이 보급되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맷돌의 실물은 전국 시대 후기의 것이고, 한나라 이후 유적에서는 맷돌의 실물과 모형, 그리고 맷돌 돌리는 모습을 그린 화상석이 자주 발굴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맷돌이 이미 한나라 때 중요한 식량 가공 도구였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들 맷돌은 대부분 당시에 밀을 재배했던 황허 중, 하류 지역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는 밀을 낟알로 먹다가 점차 가루를 반죽하여 먹는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항상 분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얀 밀가루 찐빵은 아주 가난한 벽지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고대 한나라의 ‘병’에 대한 역사 기록들

한나라 때 ‘병’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주식의 하나였으며 ‘삼보구사’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은 황제가 된 후, 부친을 고향인 페이 현에서 장안으로 모셔 왔습니다. 하지만 큰 황궁 안에서 그의 부친은 생활이 편치 않아 고향 집에서의 여유로움을 항상 그리워했습니다. 한고조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다시 페이 현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 고향에 있는 백정과 주점 주인, 그리고 상인들을 모두 장안으로 이사를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고향 풍경과 비슷하게 하나의 도시를 짓고 그 이름을 ‘신펑 현(新豊縣)’이라 불러 부친을 이 성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유방의 부친은 ‘병’을 아주 즐겨 먹었기 때문에 이사 온 상인 중에는 ‘병’을 판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현재 산시성 사람들의 분식 중에는 그 당시 장쑤성 북부 지방에서 전래된 것도 있지 않을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한나라 때의 일반 관리들도 모두 ‘병’을 즐겨 먹었습니다. 황실 내전에서 숙직을 서는 상서랑에게는 맛있는 음식으로 ‘병’을 대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대접은 황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대접이었습니다. 황제 역시 ‘병’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어, 동한의 제10대 황제인 유찬(劉纘)은 ‘병’을 먹은 후 과식으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동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는 곤란한 처지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병’을 주었던 일로 인해, 후에 그 사람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고 많은 녹봉을 내려주었습니다.


한나라 사람들이 먹는 ‘병’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탕병과 증병이었습니다. 탕병은 물에 삶은 작은 면 조각 또는 면 덩어리를 가리키며 증병을 조각내 물에 삶은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중원에서는 한나라 이전부터 이미 오래 지속된 찜 조리 기술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분식은 쉽게 찜 기술의 장점을 이용해 발전했고, 만두는 북방 사람들이 먹는 주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삼국 시대 이후 남북조 시대에는 면을 발효시키는 기술을 확보해 분식의 발전이 가속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까지 이어져 중국 음식이 서양 음식과 구별되는 특징을 형성합니다. 서양에서는 스팀 방식으로 조리하는 기술이 늦게 나온 반면, 굽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같은 분식이지만, 유럽에서는 오히려 굽는 방식을 사용해서 빵을 만들었습니다. 


고대 한나라의 밥과 죽

한나라 때의 일반 백성들은 증병과 탕병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았고 여전히 오래된 전통에 따라 만든 밥이나 죽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분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복잡한 가공 과정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밀기울도 섭취할 수 있게 되어 곡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관리들은 청렴한 생활을 드러내기 위해 때때로 보리밥을 먹기도 했고, 역사서에서는 이런 일을 미담으로 자주 인용합니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좌웅(左雄)은 기주자사로 있을 때 늘 건반을 먹었고, 사마포(司馬苞)는 태위로 있을 때 늘 녹반을 먹었으며, 이고(李固)는 태위로 있을 때 늘 보리밥을 먹었다.” 맹종(孟宗)은 어전에서 구토를 한 일이 있는데, 토한 데서 아침에 먹은 보리밥이 나와 황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칭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명한 선비인 단정(丹井)도 보리밥을 즐겨 먹었습니다. 한번은 권력이 대단한 음취(陰就)의 집에 손님으로 갔는데, 그때 음취는 보리밥에 파 잎으로 그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단정은 오히려 보통 때의 태도를 바꾸어, 제대로 갖추어진 음식을 요구하여 먹었다고 합니다.


서한 때의 승상 공손홍(公孫弘) 역시 매우 검소한 사람으로,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청빈한 생활을 요구했습니다. 옛날부터 잘 아는 사람 한 명이 그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역시 보리밥에 베로 짠 이불을 덮는 정도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불만을 가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음식은 나도 없지 않은데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누가 승상의 집에서 일을 하겠는가.” 이렇듯 아랫사람도 보리밥 먹기를 반기지 않았는데, 관료층 중에서도 보리밥을 즐겨 주식으로 먹은 사람은 실제로 많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일상 음식은 보리밥 외에 두죽(豆粥)이 있었습니다. 이 음식은 순전히 콩만 삶아 만들기도 하고, 아니면 콩과 쌀을 섞어 삶아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재해가 발생하면 관청에서는 두죽으로 빈민들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남방 사람들의 죽과 밥은 모두 쌀을 익혀서 만들었는데, 쌀밥은 껍질까지 삶은 보리밥보다 훨씬 맛이 뛰어났습니다. 이 외에도 기장과 조 같은 곡식도 죽이나 밥의 재료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